2006년 01월 29일 주일설교 Deut1815 하나님이 담아주신 말씀을 따라 신명기 18 : 15 - 20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해의 소망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 번째 새해를 맞았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력의 새해였습니다. 교회력은 이미 11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 첫 주일은 예수님의 생애를 회상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만든 교회력이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교회 생활의 기초가 되는 교회력의 새해를 맞은 지는 이미 두 달이 지났습니다. 두 번째는 양력의 새해였습니다. 양력 1월 1일은 서양의 달력으로 새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양력으로 새해를 맞은 지 바로 29일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세 번째 새해를 맞았습니다. 바로 음력 정월 초하루, 음력으로 새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음력은 우리나라 전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서민들의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어릴 때 추억 중에 설에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설하면 설빔이 생각납니다. 요즘은 언제라도 옷을 사 입을 수 있지만 어릴 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설에 새 옷 얻어 입고 추석에 새 옷 얻어 입었습니다. 설이 오기 두어 장 전 쯤에 시장에서 사다가 농속에 넣어 둔 것을 꺼내서 만지작거리면서 설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설을 며칠 앞두고 대목을 맞는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발소입니다. 미리 미리 깎으면 좋으련만 반드시 이틀이나 사흘 전에 몰려서 깎았습니다. 목욕도 이 때 하였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서 연중행사로 설맞이 목간을 하였습니다. 설을 맞으면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돼지를 잡았는데 이것을 보는 것이 큰 구경거리였습니다. 물을 끓이는 분, 칼을 가는 분, 왕소금 접시 들고 입맛부터 다시는 분. 오줌보를 얻어 차고 놀려고 기다리는 아이들 정겹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의 중요행사는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세배를 하였는데 먼저 사랑방에 들어가서 세배를 하고 안방으로 가서 세배를 하였는데 아이들 몇몇이 지칠 줄 모르고 다녔습니다. 요즘처럼 세배 돈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그야말로 어른께 인사를 하고 덕담을 듣는 것이 좋았고 많이 자랐다는 말을 듣는 것이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설은 매우 조심스러운 날이랍니다. ‘설’은 순수 우리말로써 말뜻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가 ‘서럽다’는 ‘설’이라는 것입니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서러운지 설에는 서럽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다음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 것입니다. 이 날은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여겼습니다.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입니다. 설날은 새해가 시작되는 익숙하지 못하고 낯 설은 시작입니다. 서러워서 설이든, 조심스러워서 설이든, 낯설어서 설이든 설은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겸손히 하여야 할 날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설을 쇠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정황이 바로 이 설과도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배경 사건이 있습니다. 16절입니다.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출애굽 할 때 호렙 산, 다른 말로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호렙 산 - 시내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시내 산 위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산으로 모세를 불러올리실 때의 광경이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 산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불 길 속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초월적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그 존재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무서워서 더 이상 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떨면서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그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모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그 크신 위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불길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었습니다.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불길 속에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도 산 사람이 육체를 가진 사람 가운데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당신이 나가서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하겠습니다.”(신5:24, 26-27[공동]) 백성들의 말은 하나님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놀랍고 두려운 분이시니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 당신이 대신 듣고 이야기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은 두렵고 떨림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발전소에서 오는 전기를 맨 손으로 잡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전되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를 사용하면 안전하게 전기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스토브를 통하면 전기의 따스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전구를 통하면 전기의 빛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기계를 통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쉽게 합니다. 직접 전기를 만졌다가는 큰일이 나지만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면 편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모세 당신이 하나님과 자신들을 연결시켜 주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 부탁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15절 전반 절입니다. :15a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18절 전반 절입니다. :18a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의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듣고 전하여 주기를 청하는 백성들의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을 때,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말하여 주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고 있는 선지자들, 예언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여 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세워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히브리서1:2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사람들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세워서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 말하면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또, 마태복음 21:11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지자 그 이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인 분이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13: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15절 후반 절입니다. :15b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8절 후반 절입니다. :18b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하나님이 넣어주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의 입술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입술에 담아주신 하나님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시고 그 입에 자신의 말을 담아두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선지자라는 말의 뜻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치 선지자(先知者)라는 말을 단순하게 ‘먼저’ 선(先)자 ‘알’ 지(知)자로만 해석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니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일을 먼저 알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먼저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다른 말로 예언자(預言者)라고 하는데 이 때 ‘예’자는 일기 예보할 때의 예(豫) 자를 사용하지 않고 예금할 때의 예(預) 자를 사용합니다. 마치 돈을 은행에 맡기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맡겨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가지고 계시는 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지으신 창조의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요1:14)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어느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라지요? 어느 환자가 자신을 예수님이라고 했답니다. 늘 예수님의 말씀을 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였는데 문제는 물 위를 걷겠다고 까지 하다가 저수지에 빠져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 사람입니다. 점점 심해져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대 이 사람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입원을 하던 날 자신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딱 한마디 하였습니다. “얘 내가 언제 너를 내 아들이라고 했니?” 그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여 입원한 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증거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넣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구원의 능력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말씀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 말씀을 맡겨주신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먼저 19절입니다.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이어서 20절입니다.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전하게 하시는 말씀에는 그 분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반드시 순종하여야 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넣어준 말을 듣고도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벌을 면키 어렵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전하지 않으려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에게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령들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러자 마귀를 쫓아낸다고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인들까지도 마귀 들린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스게아라는 유다인 대제사장의 아들 일곱 형제도 있었는데 그 때 마귀 들린 사람이 “나도 예수를 알고 바울로도 잘 아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냐?” 하면서 덤벼들어 그들을 모조리 때려 눕혀 그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알몸으로 도망쳤습니다.(행19:11-16) 받은 사람은 그대로 전해야 하고, 받지 않은 사람은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지 않고 받은 것처럼 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몇 일 전 한 사람이 오락실에서 주인 몰래 돈을 훔친 혐의로 서울 노량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한 성인 오락실에서 주인이 청소하고 있는 틈을 타 계산대에 있던 현금 500만원을 훔쳤는데 술에 취한데다 오락을 하다 돈까지 잃자 기분이 나빠 자신도 모르게 돈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점쟁이)인데, 자신이 설마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 잡혀올 사주일 줄은 몰랐다고 한숨을 지었다고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신년이라고 오늘 점집을 드나들 수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 본래 설의 의미입니다. 정말로 조심스러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담아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설,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말씀 듣고 그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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