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독
산소향. 이종순
왕소금 살 내린 둥근 바다
메주 틈 쑥쑥 고추, 숯 떠오르면
하늘빛 내려 와 진한 맛 키워내고
숨 죽여 누운 배추 곱게 염하여
뒤뜰에 묻어 놓고, 쌀독에 풍년들면
풀뿌리 움츠린 동지섣달에도
장 끓는 식탁은 배가 불렀다.
저배기, 오가리 어우러 장독대 이루다가
하나, 둘 깨지고 버려지고
한몸으로 감싸주던 뚜껑마저 잃고
한 오라기 바람 안고 산지 몇 해였던가
할 일 없이 앉은 자리
더는 물러 설 곳도 떠날 곳도 없어라.
담기면 담기는 대로
퍼내면 퍼내는 대로
움킬 줄 모르는 헐렁한 성품
손 뻗어 동냥할 융통성조차 없으니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는
옛 속담도 헛말일세
함박 눈 내리는 날
쌓인 눈물 고일까봐,
부여잡은 한 오라기
바람마저 떠날까봐,
차가운 바닥에 주둥이 대고 선
쓸어 주고, 닦아주고
엉덩이 윤나게 만져주던
따스한 임의 손 다가 올 것 만 같아
습내나는 베란다 모퉁이
매무새 하얀 여인이 알몸으로 서 있다
빈 배 가득 태동을 꿈꾸며!
산소향/이종순
가시꽃 사랑 - 하옥이 詩, 김동환曲, Bar. 박흥우
출처 : 산소향의 살아있는 이야기
글쓴이 : 산소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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